선택을 회피할 권리

선택을 회피할 권리와 기권의 책임적 의미

‘선택을 회피할 권리’라는 역설

우리는 수많은 갈등과 책임 앞에서 종종 “나는 아무것도 고르지 않겠다”며 결정을 유예하거나 소위 기권을 선언한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음’은 책임을 덜어내는 피난처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확고하게 특정 결과를 초래하는 자기모순적 행위가 될 수 있다.

기권이라는 이름의 적극적 서명

  • 결정의 강제성: 갈림길에서 멈춰 서서 어디로도 가지 않기로 마음먹는 순간, 이미 ‘현 위치에 머물기’라는 경로를 능동적으로 선택한 셈.
  • 사르트르가 그랬듯 인간은 ‘선택하지 않을 자유’만큼은 허락받지 못했다. 선택을 포기하겠다는 선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선택이기 때문에.

침묵과 방관의 인과적 개입

  • 현상 유지의 착각: 흘러가는 강물 위에서 노를 젓지 않는 것은 가만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류로 떠내려가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 행동이다.
  • 세상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한,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곧 ‘기존의 흐름과 추세, 타인의 결정에 내 통제 범위를 전부 위임하겠다’는 가장 중대한 결정적 개입이 됨.

심리적 유예의 에너지 소모

  • 결정을 미루는 상태는 나에게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미결 과제’라는 인지적 부하를 지속적으로 가한다.
  • “나중에 결정하자”는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상황을 관망하고 긴장해야 하므로, 아무것도 고르지 않는 상태 자체가 이미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책임을 피하기 위해 내던진 기권표는 사실 세상에 가장 무섭고도 무거운 백지위임장을 건네는 행위와 같다. 우리는 결정을 멈춤으로써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미지의 결과’를 오롯이 떠안는 또 다른 굴레로 들어서게 된다.

흔히 선거에서 “투표에 기권한다”는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의 파장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나는 기권했으니까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말자. 그리고 다음 투표는… 음…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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